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역전의 여왕’은 직장 여성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황태희(김남주 분)는 대기업 개발팀장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결혼과 동시에 추락한다. 계약직 사원으로 어렵게 직장에 복귀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위치에 절망하고 생존법을 모색한다.
황태희의 자리를 꿰찬 백여진(채정안 분)은 예쁜 외모와 애교 뒤에 주도면밀한 정치력을 감추고 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남의 공을 가로채는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차기 사장을 노리는 한송이(하유미 분) 상무는 일을 위해 결혼도 포기한 워커홀릭으로 백여진의 롤모델이다.
이들은 저마다 직장이라는 ‘남성들의 정글’에서 살아남고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성공의 문은 좁기만 하다.
중간관리자까지는 여성이 앞서
최근 여성들의 약진은 사회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입사 성적만 따지면 기업에서 여성의 우위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기업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안팎의 인정을 받으며 임원에까지 오르는 여성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회사 생활에 대한 위험한 착각’을 쓴 팻 하임 팻하임그룹 대표는 “여성들이 회사라는 조직의 게임의 규칙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회사는 여전히 남성들의 방식으로, 남성들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남성들의 문화, 남성들의 회사 생활을 잘 알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그래야만 여성도 회사라는 경기장에서 주전 선수로 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직장 생활에 처음부터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진희 네오팜 영업마케팅본부장은 “여성도 중간관리자까지는 잘 올라간다”고 말했다. 주어진 것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은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타난다.
나 본부장은 “고위직에 오르려면 단순히 시키는 것만 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원에게는 새로운 일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장기적 비전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필수다.
직장 생활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실력보다 충성심이 중요해진다. 나 본부장은 “학벌이나 토익 점수는 회사를 들어오는데 중요할 뿐”이라며 “얼마나 조직에 충성하고 뼈를 묻느냐가 회사 내에서 개인의 성장 속도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조직 몰입도는 남성과 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남성은 조직에서 쫓겨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하다. 반면 여성은 이를 인생의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녀 차별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은 여전히 엄격하다. 남직원이 자녀의 유치원 발표회로 일찍 퇴근하면 ‘자상한 아빠’라는 호의가 쏟아지지만 여직원이 똑같은 이유로 퇴근하려고 하면 ‘애 좀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고 저런다’는 평가가 뒤통수를 때린다.
나 본부장은 “여성에게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현실”이라며 “본인은 억울할 수 있지만 남성보다 한 단계 높은 잣대를 스스로 들이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임원 되면 수평적 리더십 중요해져
국내에서도 여성 임원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헤드헌팅 업체인 커리어케어 조혜정 수석 컨설턴트는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특별히 남녀 가리지 않고 임원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며 “자리에 따라서는 여성이 유리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여성 임원이 활약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마케팅과 홍보다. 외국계 기업에서는 재무와 인사 쪽은 여성 인력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직장 생활에서 여성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은 네트워크다. 조 컨설턴트는 “기업에는 대부분 내부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있다”며 “이 네트워크에 끼이지 못하면 핵심 정보에서 소외된다”고 말했다.
남성들은 어떻게든 이 네트워크에 들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자기 업무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서로 당겨주고 끌어준다.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모르는 여성들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기업에도 여성 인재 활용은 풀어야 할 과제다. 여성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현숙 전 한국코칭센터 대표는 “기업은 업무 몰입도가 높고 성과가 좋으며 회사가 투자했을 때 개인적인 사유로 그만두지 않을 인재를 원한다”고 말했다.
고 전 대표는 여성 임원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자질로 수평적 리더십을 꼽았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에 조직 적응이 쉬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남성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챙기는데 익숙하지만 여성들은 자기 일만 볼뿐이다.
임원이 되면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고 전 대표는 “여성이 임원이 됐다면 실력은 더 이상 볼 게 없다”며 “이제 더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협력을 구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톰 피터스는 21세기 경제가 여성의 특성에 잘 맞는다고 갈파했다. 고 전 대표는 “여성은 신뢰에 민감하고 물질적 보상보다는 자기 동기부여에 움직이는 특성이 있다”며 “일단 믿음을 주면 조직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헌신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이영희 KT 그룹컨설팅지원실장 “기업은 조직 적응력 뛰어난 ‘소프트’한 인재 원해”
이영희 KT 그룹컨설팅지원실장은 KT 최초의 여성 임원이자 공기업 최초의 여성 임원이다. 1980년 기술고시(18회)에 홍일점으로 합격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임원 승진 후 사내에서 여직원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망 설계와 구축을 맡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서비스의 기틀을 다졌고, 미디어본부장을 맡으면서 IP-TV 상용화를 주도했다.
여성들이 직장 생활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마이너 입장이기 때문에 주요 보직 등 유리한 기회에서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네트워킹 등에서 소외돼 조직 적응에 실패해 나쁜 평판을 받게 되면 회복하기가 어렵다. 남성들과 어우러지는 환경에서 리더십을 훈련받을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관리자로 크기가 쉽지 않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을 때는.
벨기에 알카텔에 2년간 파견을 나가면서 네 살, 한 살짜리 아이들과 헤어져 지내야 했다. 앞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가 보니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인생에서 가족의 소중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기업은 어떤 여성 인재를 원하나.
조직 적응력이 뛰어나고 소프트한 인재를 원한다. 과거에는 터프한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개방성과 적응력이 필수다. 현실적으로 여성이 조직을 주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역할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뛰어난 인재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조직 적응력을 어떻게 키우나.
대부분의 여성은 로맨티스트고 원칙과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때로 순간적인 양보와 협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달성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여성 임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문성과 차별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려면 꾸준한 학습을 통해 실력을 키워야 한다. 관리직으로 올라가려면 리더십도 필요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남성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들과의 관계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 고위직으로 가면 전략적 사고도 필수다. 각 레벨별로 게임의 법칙이 다르다. 이를 잘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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