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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지르 부토에 대하여...
2008. 02. 11
베나지르 부토에 대하여...

2007년 12월 27일,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피격 직후 국제사회는 일제히 부토의 치적을 기리며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그의 죽음이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을 후퇴시키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부토 전 총리의 이슬람 세계 첫 여성 정치지도자로써의 능력과 업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잇따르고 있다. 파키스탄인들은  망명기간에도 당수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두 번이나 총리직에 오른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그녀가 파키스탄의 민주화와 이슬람 여성들의 인권신장에 실질적으로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1988년 부토가 처음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 그는 파키스탄 여성들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정치지도자가 되어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재임 초기, 여성부를 신설하고 여성 실태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해 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사업 추진을 시도했다. 또한 94년에는 국제언론사진기자단이 부토가 파키스탄 최초로 경찰에 의한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전 직원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경찰서를 만든 것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처럼 부토는 파키스탄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노력을 보였으나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또한 부토는 취임 후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민주화개혁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결과적으로 빈곤층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여성 인권도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토는 훌륭한 반독재 투사였지만 국정운영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키스탄인들의 마음이 돌아선 또 다른 이유는 그녀와 남편의 부정부패였다. 1991년 그는 자신과 남편의 부패 혐의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1993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한 부토는 두 번째 총리에 올랐으나 다시 부패혐의가 불거지면서 96년 또다시 실각했다. 부토의 남편 자르다리는‘미스터 10%’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이권사업마다 개입해 뇌물을 받아 챙겼으며, 각종 부패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는 부토가 총리에 재임하던 시절 환경장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부토는 99년 군부정권인 무샤라프 정권이 출범하자 자발적으로 해외 망명길에 올랐지만 망명 후에도 오명에 시달려야 했다. 불법자금 세탁, 전투기 구매비리 등 부토의 부패상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스위스, 폴란드, 프랑스, 이란, 두바이 등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부토는 결국 작년 1월 인터폴의 적색수배 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됐다. 이러한 부패혐의 등으로 인해 부토에 대한 파키스탄인들의 실망감은 커져만 갔다.

또한 파키스탄인들은 부토가 여권주의자로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여전히 파키스탄 여성들은 빈곤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토 전 총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결국 그녀의 죽음 때문이라는 신랄한 비판과 함께 결국 그녀는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성 정치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정치적 후광을 입고 정계에 입문하였으나 결국 구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그녀의 상징성은 여전히 크다. 하지만 더이상 가문이나 남성의 그늘이 아닌 진정 홀로 설 수 있는 여성정치지도자가 나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가문의 정치적인 상속자가 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정치적 역량을 키우겠다"며 독립선언을 한 베나지르 부토의 조카인 파티마(Fatima Bhutto)가 파키스탄을 넘어 이슬람 세계 여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부토의 일생 *
 그녀는 1953년 6월 21일 파키스탄 최초의 민선 총리이자 전 대통령인 줄피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돼 특별교육을 받았다.
 줄피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 국민당(PPP,Pakistan Peoples Party)을 창당하였으며, 파키스탄 핵무장 프로그램을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부와의 갈등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의해 정적인 아흐메드 라자 카수리(Ahmed Raza Kasuri)의 암살지시로 1979년 4월 4일 아침 교수형에 처해졌다.
 베나지르 부토는 1969년부터 4년동안 하버드 대학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비교정치학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정치학·경제학을 공부했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에는 아버지에 이어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학내 대표적인 토론그룹인 ‘옥스퍼드 유니언(Oxford Union)’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자르다리 부족출신의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Asif Ali Zardari)와 결혼하여 슬하에 빌라왈(Bilawal), 바카르트와르(Bakhtwar) 그리고 아시프(Aseefa)의 세 자녀를 두었다.
 1988년 11월 16일 10년 만에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거에서 PPP가 여당을 누르고 최다 의석을 획득했고, 부토는 35세의 나이에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총리로 당선됐다. 같은 해 부토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중 한 명에도 선출되었다. 그는 본인과 남편의 부패혐의로 91년 실각 후, PPP는 10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 후 3년간 부토는 나와즈 샤리프 정권에 대항하는 야당의 리더를 맡았다. 심기일전한 부토는 1993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해 두 번째 총리에 올랐으나 남편의 부패혐의가 불거지면서 96년 또다시 실각했다.
 99년 군부정권인 무샤라프 정권이 출범하자 자발적으로 해외 망명길에 올랐던 부토는 지난해 10월 8년 만에 귀국해 최근까지 파키스탄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다. 귀국 당시에도 자살폭탄테러를 당했지만 큰 부상은 입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난 해 12월27일 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했던 라왈핀디에서 선거운동을 펼치다가 권총공격과 자살폭탄공격으로 암살당하게 되었다.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박 선 희
The Role of Parliamentary Committees in Mainstreaming Gender and Promoting the Status of Women Women and Politics in Indonesia: A General Overview of Strengthening Wo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