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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할머니 육아
2011. 03. 17 KIWP
억세게도 운이 없는 한 아줌마가 있다.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자랐다. 그것이 한이 되어 부부가 기러기로 떨어져 살면서도 딸만은 잘 가르쳤단다. 딸을 출가시킨 후에 신혼같이 살 꿈을 꾸며 힘든 시절도 참고 지냈다. 드디어 딸이 결혼을 하고 부부는 재회하여 새 삶을 준비하던 중. 똑똑한 딸이 똑똑한 직장도 구하고 똑똑하게 생긴 애도 낳았다. 그런데 애 맡길 곳이 없더란다. 친정과 딸 집은 출퇴근에 오고 가고 할 거리가 아닌 서울 끝에서 끝. 못 배운 한을 딸이 대신 풀어주길 원했던 엄마. 할 수 없이 부부만의 삶을 다시 포기하고 엄마 혼자 딸 집에 들어가 애 봐주고 있단다. 기러기 아빠가 늙어서 기러기 할아버지가 된 셈이다.

 이런 집들이 아주 많단다. 딸이 자기 몫의 일을 해 내도록 똑똑하게 키워낸 엄마들. 행여 그 딸이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하고 집에서 애만 키울까 봐, 그래서 행여 자기 뒤를 이을까 봐 그게 겁이 나서 애 보기를 다시 시작하는 환갑이 다 된 할머니들. 애를 봐줄 수 있을 만큼 건강과 경제적인 능력이 받쳐준다면, 그래서 육아가 큰 즐거움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괜찮다. 하지만 그 나이면 갱년기도 되고 그간 뼛골 빠지게 열심히 살았기에 부부 둘만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다. 늘 양보만 하며 살던 대로 ‘그래, 이 한 몸 희생해서 내 딸이 당당한 커리어 우먼이 된다면야’ 하며 딸의 육아를 대신 해주고 있다는데. 부모의 의무는 ‘네버 엔딩 스토리’인가.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 새끼가 혼자 일어나 먹이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만 돌본다고 한다. 요즘 부모들은 마치 새끼를 낳자마자 자기 몸을 자식에게 내어주는 가시고기 같다. 1~2년의 육아인데 뭘?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엄마랑 할머니랑 체력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찰떡과 속 빈 강정의 차이다. 도우미를 둘 여유라도 있다면 처지가 좀 낫긴 하겠다. 하지만 딸의 딱한 처지를 잘 알기에 몸이 힘들어도 거절이 쉽지 않다.

 은퇴 후의 삶 같은 것은 감히 설계도 못해보고 포기해 버린 늙고 병든 부모님.

 그들에게 육아를 떠맡기지 마라. 이런 맞벌이들의 육아는 나라에서 책임져야 한다. 친구 중에 집안 꼴은 폭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해놓고선 자기 몸은 엄청나게 치장하며 신경 쓰는 애가 있다. 겉모습에만 유난히 공을 들이는 ‘서울’이 바로 그 친구 같다. 불필요한 인공 실개천, 한강 예술 섬, 한강 다리마다 매달린 형형색색의 전등들. 르네상스 서울?… 그걸 보러 외국에서 한국에 오는 이들은 없다. 전등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은 한강 다리 밑이 아니라 성폭력의 사각지대인 어두운 주택가의 가로등이다.

 겉치장에 쓸 그런 돈으로, 턱 없이 부족하다는 인증 받은 보육시설을 많이 많이 늘려야 할머니들이 육아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겠는가. 보육시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엄마에게 맡긴다고? 유기농 식품 만드는 과정도 보지 못하고 인증 마크 하나로 믿듯이 철저한 검사를 완벽하게 거친 후에 인증해 주면 믿게 되지 않을까.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살고, 할머니가 당당해야 나라가 풍요로워진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중앙일보(3.17)
홈페이지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010/5205010.html?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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